Innermost 검색 결과

30개 발견
  1. 미리보기
    2017.12.18 - retrouvailles

    읽을 추리소설 목록

  2. 미리보기
    2017.12.18 - retrouvailles

    크롬 느려졌을 때 TIP

  3. 미리보기
    2017.12.18 - retrouvailles

    중독에 관하여

  4. 미리보기
    2017.12.18 - retrouvailles

    내가 좋아하는 화가들 II

  5. 미리보기
    2017.12.18 - retrouvailles

    내가 좋아하는 화가들 I

  6. 미리보기
    2017.12.17 - retrouvailles

    오랜만에 플레이리스트

읽을 추리소설 목록

2017. 12. 18. 12:17 - retrouvailles



1. 아가사 크리스티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비뚤어진 집, Y의 비극, 잠자는 살인, ABC 살인사건, 움직이는 손가락, 크리스마스 살인

2. 윌리엄 아이리시 : 환상의 여인

3. 앨러리 퀸 : Y의 비극

4. 이든 필포츠 : 붉은 머리가문의 비극, 어둠의 소리

5. 레이먼드 챈들러 : 기나긴 이별

6. 가스통 르루 : 노란방의 비밀

7. S. S. 벤 다인 : 비숍 살인사건

8. 빈 다인 : 그린 살인사건

9. 코난 도일 : 바스커빌가의 개

10. 크로프츠 : 통

다른 카테고리의 글 목록

Innermost/기억해두고 싶은 카테고리의 포스트를 톺아봅니다

크롬 느려졌을 때 TIP

2017. 12. 18. 11:57 - retrouvailles



실험 결과 확실히 빨라짐. 

거의 1분만에 창이 켜지는 듯.. 

다른 카테고리의 글 목록

Innermost/기억해두고 싶은 카테고리의 포스트를 톺아봅니다

중독에 관하여

2017. 12. 18. 11:50 - retrouvailles



1

'중독'이란 다만 어떤 약물적인 것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에 대한 매력을 조절하지 못하고 의지가 무한히 어떤 것을 갈망하게 되는 것이 모두 '중독'이다.

인간의 의지가 매력의 노예가 될 경우 그것이 무엇이든지 중독이다.


이 경우 인간이 가진 어떤 것에 대한 '매력'은 더 이상 자신을 충만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 된다.

알콜에 대한 중독, 돈에 대한 중독, 권력에 대한 중독, 아름다운 육체에 대한 중독, 심지어 물건 사는 것에 대한 중독 등

현대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중독이 너무나 많다.


따라서 욕망이 삶을 망치는 경우는 모두 비-정상적인 욕망으로 인해 무엇에 중독이 되었기 때문이다.


파스칼이 '본성은 인간을 불행하게 하지만, 욕망은 인간을 행복한 상태로 이끈다'고 하였을 때,

이 본성이란 의지의 통제를 벗어난 무절제한 본능적 추구를 말하며, 이것이 곧 비-정상적인 욕망인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올바르게 실행되기만 한다면 그것은 곧 자신의 행복을 위한 원동력이 되는 무엇이다.


그래서 루소 같은 철학자는 학문의 목적도 "기쁨을 욕망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클로델은 "지성조차도 욕망의 충격 아래서 작용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행위한다는 것에는 어떤 '욕망'이 근원적인 원동력처럼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욕망은 우리의 행위를 유발하고, 우리의 행위를 완성하며,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복을 지향하는 가장 최초의 원리가 되는 것이다.



​2

​중독을 일으키는 것은 정말 무엇인가?


다이아모르핀은 헤로인입니다. 사실 거리에서 사는 것보다 훨씬 고품질이에요.

왜냐하면 마약 거래상들의 것들은 오염되어 있어서 아주 일부분만이 헤로인인 반면 의사에게 처방받는 것은 의료용이므로 순수합니다.

꽤 오래 투여받게 됩니다. 이 방에 많은 분들이 계신데, 모르는 사이 헤로인을 꽤 많이 맞으셨어요.


중독에 대해 우리가 믿고 있는 게 옳다면 그런 화학적 유인에 노출된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모두 중독자가 되어야 합니다. ... (하지만) 중독되지 않아요.


우리가 늘상 하는 중독에 관한 이야기는 20세기 초반에 이뤄진 일련의 실험에서 나왔다구요. 정말 단순한 실험이었죠.

우리에 쥐 한 마리를 넣고, 물병 두 개를 줍니다. 한 병은 그냥 물이고 다른 병은 헤로인이나 코카인이 든 물이죠.

쥐들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마약이 든 물을 선택하고 빠른 속도로 스스로를 죽여갑니다.

그렇죠? 일반적인 생각과 일맥상통합니다.


알렉산더 교수는 '쥐 공원'이라는 우리를 만들었어요. 쥐들에게 천국같은 장소를 만들어주는 거죠.

... 그리고 두 종류의 물병이 주어집니다. 일반 물과 마약이 든 물.

그런데 여기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 벌어집니다. '쥐 공원'에서는 쥐들이 마약이 든 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 혼자 고립되어 있을 때에는 거의 100%의 남용률을 보였다가 행복하고 교류하는 삶을 살 때는 0%로 떨어진 것입니다.


알렉산더 교수는 이렇게 생각했죠. 중독에 다른 측면이 있지 않을까?

... 중독이 환경에 대한 적응 기전이라면?


사람들에게는 교류하려는 타고난 자연스런 욕구가 있고 우리는 행복하고 건강할 때, 서로 결속하고 관계를 맺습니다.

하지만 정신적 충격을 받거나, 고립되거나, 삶의 무게에 억눌려 교류를 할 수 없을 때

당신은 안도감을 찾기 위한 어떤 것을 갈구하게 됩니다.

... 그게 우리의 본능이기 때문에 뭔가와 결속하고 교류합니다. 그게 사람으로서 우리가 원하는 것이죠.


중독의 핵심은 제 생각에, 그리고 증거가 제시하듯이, 현실의 삶을 영유하기 어려울 때 발생합니다.


우리는 온갖 종류의 중독에 취약한 문화권에 살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에서부터 시작해서 쇼핑, 음식까지요.

... 저는 소통의 단절이 중독의 주된 요인이라고 말했는데 단절이 늘어나고 있어요.

역사적으로 어느 때보다도 잘 연결된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어떻게 보면 지금의 소통은 인간 교류의 흉내일 뿐이라 생각합니다.


집에서 개인이 갖는 공간의 규모는 꾸준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가 선택한 문화의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공간과 친구를 맞바꾸고, 물질과 교류를 맞바꾸고, 그 결과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외로운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 개인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무언가가 잘못되었습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우린 당신을 사랑해요"는 중독자들을 대하는

사회적, 정치적, 개인적인 모든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독의 반대는 단지 맑은 정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독의 반대는 관계입니다.


3

술취함을 면밀히 살펴보면, 이는 주권(lordship)의 문제이다. 누가 당신의 주인인가?​


그러나 이런 술 숭배는 사실상 자기 숭배(self-worship)의 한 형태이다.


당신은 당신이 느끼는 정체성의 부족함을 그녀(술)로 채웠어요.

... 그러나 사실상 그녀는 배신자요, 독사였고, 당신이 즐긴 시간은 '무덤 속 향연'이었음을 명심해야 해요.

그녀의 목적은 당신의 죽음이라구요.



​4

​중독이 갖는 현상학적 특징, 집착ㅡ강박ㅡ재발.


노예처럼 자신 스스로를 무언가에 몰입(집착)시켜 쾌락의 만족감을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현상.



​5

​우리는 중독이라고 하는 낱말을 명백히 눈앞에 존재하는 것들에게만 적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도박, 섹스, 섭식, 쇼핑, 성형과 같은 행위에도 중독이라는 낱말을 적용하여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 우리가 긍정적인 것으로, 또는 삶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것으로 보통 여기고 있는 사랑, 일, 운동에도 이 낱말이 사용된다.


Addiction은 라틴어 addicere로 소급한다.

이 라틴어 낱말은 '무엇에 굴복하다, 무엇을 양도하다, 무엇에 매진하다'를 의미한다.

또한 addict라는 라틴어 낱말은 직접적으로 노예를 가리키기도 하였다.

즉 중독 개념은 본질적으로 '어떤 것에 매진함으로써 자신을 그것에 넘겨주는 형태로 굴복함'을 의미한다.


... 인간은 쾌감을 일으키는 것 자체에 중독된다.

따라서 중독은 "부적응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행동에 대한 자기 조절력(혹은 자기 통제력)의 상실"이다.


종교개혁의 과정에서 비로소 노동에 삶의 필요성을 훨씬 넘어서는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다.

노동은 이제 신학적 의미 맥락 속에 편입되어 정당화되고 그 가치가 격상되기에 이른다.

... 캘빈주의자는 자신이 구원받을지 또는 버려질지 확실히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오직 자기밖에 의지할 데 없는 개인으로서 ... 오직 일에서의 성공만이 신에게 선택받은 징표로 해석된다.

구원에 대한 근심 때문에 캘빈주의자는 노동자가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속적 직업으로서의 의무 이행은 도덕적 가치를 획득하게 된다.

고대 그리스부터 중세까지만 하더라도 가치는 사색적 삶에 부여되어 있었다.

그러나 가치가 전도된다. 가치는 사색에서 노동으로 옮겨오게 된다.

노동의 지배는 모든 것을 노동에게도 모아들인다.

휴식은 노동을 위한 휴식이다.

스트레스 해소는 노동을 위한 해소다.

따라서 '긴장 이완'이나 '마음 끄기'는 ... 무엇보다 일할 수 있는 능력을 다시 회복하는 데 기여한다는 점에서 노동과정에 종속돼 있다.

노동하는 시간 이외의 시간이 노동을 위한 것으로 사용되게 되면서,

그 시간들은 모두 가치 있는 노동에 봉사하는 것으로서 그 가치가 '평등'해진다.

달리 말하자면 노동하는 시간이 아니라면 '그 무엇을 하더라도' 노동하는 시간만큼의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

여기에 더해 노동에 봉사하지 않은 시간은 무가치한 것이 된다.


근시대에 하나의 변화가 더 일어난다.

산업혁명 이후 과학기술이 급격히 발전한다.

많은 사람이 일해야만 할 수 있었던 일을 한 사람이 기계만 조작하면 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과학기술은 우리에게서 노동을 빼앗아간다.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는 기존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주어지거나 아예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생겨나게 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가치는 노동에 부여되어 있다.

노동이 부족해진 상황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게 된다.

사람들은 강박적으로 무엇을 하고자 한다.

기술이 노동을 앗아가 버렸으므로, 가치가 부여된 노동은 더 이상 만족할만큼 할 수 없고,

이전에 가치가 부여되어 있었던 사색은 노동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과 다르지 않는 것,

혹은 그것이 노동에 봉사하지 않으므로 무가치한 것이 되어버렸다.

이제 사람들은 그 시간을 ​'뛰어 넘기'​를 바라게 된다.


사람들은 '가치 있는' 여기에서 '가치 없는' 저기로 나아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여기에서 여기로 곧장 뛰어넘기를 바란다.

즉 사람들은 난데없이 주어진 시간을 뛰어넘어 시간이 없는 여기에서 다시 시간이 없는 여기로 곧장 나아가길 바란다.

텔레비전 채널은 끊임없이 넘어가고, 그래도 여기로 가지 못하면 스마트폰을 집어 든다.

스마트폰 속에서도 끊임없는 여기로 넘어 다닌다.

스마트폰의 등장은 우리에게 항상 월드와이드웹을 제공한다.

그곳에서 그들은 점과 점으로 뛰어넘어 다닌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시간은 없다.

단 몇 초의 기다림도 견디지 못해 기술은 점점 더 발전한다.

그들은 '끊임없는 여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끊어져 있다.

사람들이 뛰어 넘는다는 사실에서 여기와 여기가 끊어져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

이러한 끊임없는 끊어진 여기가 바로 그들 스스로 갈망하며, 온 세상이 즐기라 권하는 '여기, 지금'의 여기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곤 하는 '지금을 즐겨라'라는 말은 우리가 다루고 있는 사태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여기와 지금은 무엇인가?

우리가 주변을 둘러봄으로써 확인할 수 있는 '여기'와 '시간은 지금의 연속'이라고 말할 때의 '지금'이 여기와 지금인가?

사람들은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알 수 없다.

이미 지나간 과거를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다룰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일반적으로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 예측된 '미래'는 그것이 과학에 의해 예측되었으므로 아직 오지 않은 것으로서의 미래로 간주되기보다, 반드시 올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과학의 영역 내에서 미래는 현재와 동의어다.

그러나 우리는 미래를 이미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미래를 간접적으로나마 다루기 위해 혹은 예측하기 위해 현재를 다룬다는 것은 거꾸로 놓고 보자면

현재가 미래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 속에서 우리는 이미 미래를 아직 오지 않은 것으로서, 즉 부재의 현존으로서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는 지금 이미 도래해 있고, 과거는 지금 여전히 머물고 있다.

지금은 단순한 '지금'이 아니다.

여기 또한 단순한 '여기'가 아니다.


'여기와 지금'을 강조하는 현대는 우리의 시공간을 무한한 '여기'와 무한한 '지금'으로 쪼개어 즐기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여기와 지금'을 즐기기 위해 시간을 쪼갠다.

심지어 그들은 '지금'을 즐기기 위해 '지금'이 아닌 시간을 죽인다.

모든 시간을 지금으로 만들어 건너 뛰어 다닌다.

'킬링 타임'용 컨텐츠는 셀 수조차 없게 되어버렸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자신의 삶을 파편화한다.

그들은 아직 오지 않은 것과 이미 지나간 것을 여기와 지금 경험하지 못하게 된다.

사람들은 '여기와 지금'에만 머물게 됨으로써 중독에 빠져들기 쉽게 된다.

그래서 현대가 중독을 질병으로 진단함에 따라 비로소 중독이 문제가 된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삶을 고유하게, 그리고 온전히 떠맡을 수 있게 해주는 거기와 자신의 시간에 머물지 못하게 되었다.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의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과, 여기와 저기가 하나라는 사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비로소 인간의 삶이 하나의 동일성을 확보하고 고유해진다는 것을 치료자들은 알지 못한다.

... 그들은 '여기와 지금'만 치료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시간을 가지고 있지 않다.

소유는 소유자의 소유물에 대한 자유를 의미하므로 소유자는 소유물의 사용, 유지, 훼손, 폐기가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에 대해 자유롭지 못하다.

오히려 시간은 우리의 끝없는 유한성만을 깨닫게 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여기와 지금'만을 즐기려 하는 것이다.

그것의 극단에 중독이 서 있다.

'여기와 지금'을 즐기라는 말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다만 양자는 각각 자신들의 또 다른 계기들과 하나의 통일성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인간의 유한성은 기다림으로써 받아들일 수 있다.

이 기다림은 자신의 삶을 기다리는 것이며, 돌아가야 할 거기로 돌아가기 위한 기다림이다.

현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여기에서 여기로 넘어 다니지만, 결코 기다리지 않는다.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건과 사건 사이의 시간을 뛰어넘으려 시도하거나 다른 사건을 만들어 채워 넣으려 한다.

그러한 시도들의 극단에 중독이 있다.

중독을 일으키는 것들은 중독자들에게 보상을 주고, 중독자들은 그 보상을 하나의 사건과 동일한 것으로 여긴다.

즉 보상은 '여기'로서 간주된다.

중독자들은 그것이 주는 '일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여기들의 일관성은 인간의 삶 전체가 이루는 동일성과는 다른 것이다.

이들의 뛰어넘음 속에서는 기다림 속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삶을 비로소 만날 수 있음을 알 방법이 없다.

삶은 우리에게 근거가 되어주는 것으로서 거기에서 비로소 다른 것들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그런 것이다.



​6

​술은 영혼보다는 육신에 작용하면서도 우리를 정직하게 만드는, 비플라톤적이면서도 정의로운 물질이다.


우리는 술을 마신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죽어가면서 술을 마신다.

... 음주에는 쾌락 이상의 것이 있다. 


이런 놀라운 생산력의 밑바닥을 이루기도 하는 술에 대한 욕망은 잊히는 법도, 중단되는 법도 없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술을 마시는 이유는, 일단 표면적으로는 자신이 알콜 중독이 아니며, 충분히 마시지 못했다는

나름대로의 합리적 근거와, 언제든 음주를 중단할 수 있다는 자신의 실천 이성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늘 충분히 마셨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마지막 술잔을 무한히 멀리 연기하는 이런 알콜 중독의 특징은

바로 알콜 중독 특유의 시간 구조, 우울증의 시간 구조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알콜 중독의 독특한 시간 구조란 어떤 것인가?

... "알콜 중독자는 반과거나 미래 시제의 삶을 살지 않으며, 단지 어떤 '복합과거'만을 가질 뿐이다."

과거의 일시적 행위나, 현재와 관련해서 이해된 과거의 행위를 나타내는 복합과거는

'현재조동사'와 '과거분사'라는 두 개의 동사 또는 '두 순간'으로 이뤄진다.

복합과거의 이 두 순간이 알콜 중독자가 사는 시간이다("나는 마셨다").


알콜 중독자에게 과거란 현재와 일치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현재 배후로 뒤처지는 '잃어버린 시간'이다.


술을 마신 순간은 현재와 일치하는 법이 없다.

과거분사적인 삶을 사는 알콜 중독자에게 그 순간은 늘 현재조동사 뒤로 끊임없이 물러나는 시간이다.

따라서 술을 마신 순간은 늘 잃어버린 시간으로, 상실된 것으로만 도래할 뿐이다.


이 상실이 바로 알콜 중독을 ... 체험하는 우울증의 조건을 구성하는 것이다.

"과거의 이 탈주 효과, 모든 측면에서 대상의 이 상실은 알콜 중독의 우울증적 측면을 구성한다."


우울증은 대상의 상실로 인한 자아의 빈곤함에서 발생한다.

그런데 대상의 상실이란 시간적 또는 문법적 차원에서는 도저히 현재와 합치될 수 없는 과거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런데 대상의 이 상실은 왜 노스탤지어 같은 것이 아니라 우울함을 야기하는가?


우울증에 따라다니는 저주, 자기 모욕 내지 자기에 대한 징벌은 자기가 상실한 대상에 대한 섭섭함을,

그 대상을 잃어버린 자신에게 돌린 결과이다.

그러므로 과거분사의 형태로 영원히 대상을 상실하고 있는 알콜 중독자는 잃어버린 대상의 자리를

메우기 위해 술을 마시나, 술 마시기는 어떤 대상도 돌려주지 않고 다시 숙명적으로,

복합과거 속의 과거분사 형태로 주제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잃어버린 순간이 될 뿐이고 우울은 계속된다.


"놈은 잃어버린 것과 재회하기 위하여 더욱 깊은 알콜의 안개 속을 방황하기 시작했다."


알콜 중독자에게 마지막 한 잔은 늘 가장 이상적인 충족감에 한 걸음 미치지 못하는 부족한 잔인 것이다.


알콜 중독자의 이 건강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우울한 숙취의 고통 속에서 비로소 '생명을 느끼는' 이상한 건강함은?


몽테뉴가 알콜을 찬양할 때는, 어떤 관점에서 바로 주체성이 없는

해방의 상태로 알콜이 생명을 고양시키는 발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약물이나 술의 효과들이,

만일 이 물질들의 사용을 규정하는 사회적 소외의 기법들이

혁명적 탐구를 통해서 전복된다면,

이 사용과는 독립적으로 세계의 표면에서 그 자체로서 다시 체험되고 회복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포기할 수 없다."

다른 카테고리의 글 목록

Innermost/Line by Line 카테고리의 포스트를 톺아봅니다

내가 좋아하는 화가들 II

2017. 12. 18. 11:44 - retrouvailles


Francis Bacon ​프란시스 베이컨 1909.10.28~1992.04.28 


- 아일랜드 태생의 영국의 상징적인 화가,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사망. 

- 대담하고 기괴하며 원시적인 이미지, 감정적. 인간의 고독과 잔혹, 공포를 주제 삼아 주로 인간의 신체를 그렸던 사람. 

- 교황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림, 친한 친구들의 자화상으로 유명해졌다. 

- 그의 그림에 재현돼 있는 추상적 형체들은 공간과 같은 기하학적 우리에 격리돼 있으며, 이는 별 특징 없이 단순한 평면적 배경과 반목한다. 

- 그는 자신이 특정 이미지를 연속해서 포착한다고 말한 바 있는데, 실제로 그의 작품을 관찰하면 하나의 대상이 일정한 시간적 틈을 두고서 두 폭이나 세 폭짜리 형식으로 재현된다. 

- 따라서 베이컨의 작품은 넓게 보아 한 가지 모티프에 대한 연속이나 변주쯤으로 이해할 수 있다. 

- 1920년대 초현실주의와 피카소에 영감을 받고 피카소 작품을 모사 혹은 그 나름대로 해석하는 것으로 활동을 시작. 작품 활동 초창기에 해당하는 1930년대에 베이컨은 피카소 그림에 영향을 받은 복수의 세 여신(the Furies)을 그렸고, 1940년대로 넘어가서는 방이나 기하학적 구조에 갇혀 있는 남성의 머리를, 1950년대에는 비명 지르는 교황들, 1950년대 중엽에는 동물과 외로운 존재들, 1960년대에는 친구들의 자화상, 1970년대에는 존재론적으로 허무주의적인 자화상을, 그리고 말기인 1980년대에는 좀 더 냉소적이고 기교가 있는 그림들을 그렸다. 

- 흔히 베이컨 전문가들 사이에서 베이컨 미술 경력 중 1920년대를 베이컨 양식 형성의 출발기로 규정, 2차대전이 끝나고 1950년대가 넘어서야 양식의 완성단계를 비로소 이룩했다고 평가하곤 한다. 그러나 습작 대다수를 스스로 찢어 버리거나 불태워 없애버려 오늘날 그의 초기 작품은 거의 확인해 볼 길이 없다. 

- 미술 학교에 발 디뎌 본 적이 없는 독학 화가. 미술 이외에도 문학, 영화, 음악 등 예술 다방면을 넘나드는 왕성한 예술 향유가. T.S.엘리엇과 제임스 조이스, 에즈라 파운드와 같은 근대 문호들의 문학 세계에 익숙했으며(이쯤되면 어떤 스타일의 사람인지 안 봐도 알겠다), 영화에도 조예가 깊어 아이젠슈타인에서 비스콘티에 이르는 근현대 거장들과 개인적 친분을 맺기도 했다.  

- 그는 70살이 넘어서도 베니스 비엔나레와 전세계 유명 미술관의 전시회에서 예술성을 인정받고 명성을 누리며 성공한 미술가의 인생을 살았다. 그치만 생전 그림을 그려 번 수입의 상당 부분에 대한 세금을 상습적으로 내지 않았던 사람. (으으... 도덕적으론 영 별로였는데?) 

- 그는 사적으로 공개적인 동성애자였으며, 별난 캐릭터를 가진 기인이자 매력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유럽 곳곳을 떠돌며 다채로운 애정행각을 서슴지 않았던 사람. 동료 미술가와 미술계 인사들 사이에서 성격 좋은 사교적 인물로 통했다. 


- 베이컨의 작품은 인간 실존의 문제에 선행하는 근본적인 존재의 심연, 무의식적인 층위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 화가들은 시각적으로 재현 가능한 대상을 모델로 선택할 수 있지만, 평상시에는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비지각적인 것'을 화면에 구현하기도 한다.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 현전하지만, 의식적인 지각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으로, 벤야민의 언급처럼 '시각적인 무의식의 지대'에 있는 것이다. 

- 이러한 맥락에서 베이컨은 인체의 시각적인 외형을 재현하고자 하지 않고 재현으로 매개되지 않은 심연에서 터져 나오는 감각적인 것의 형상을 그리고자 했다. 이를테면 <형상들>. 이 작품은 신체에 대한 연구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외 <신체연구, 앵그를 따라서>,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등은 앵그르의 인체도상을 재해석한 작품들이다. <미셸 레리스의 초상>과 <자화상> 같은 얼굴 형상에서는 베이컨이 재현하고자 했던 지점들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 베이컨의 형상들은 홀로 있더라도 중첩되거나, '만지는 몸과 만져지는 몸의 충접'이 짝을 이룬다. 그 형상들은 서로 유사하게 중첩될지라도, 근본적으로 비재현적이고 비관계적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그것은 낯선 감각들이 서로를 끌어안는 것이고, 형상들 사이의 '공명'이다. 

-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와 같은 삼면화에서 그러한 공명은 '리듬'으로 전환된다. 전통적으로 중세 종교화에서 사용되는 삼면화는 움직이는 회화다. 실제로 화면은 고정돼 있고, 서로 분절돼 있지만, 영화의 흐름이 쇼트와 쇼트로 이어지는 것처럼, 삼면화에는 그러한 리듬이 살아 있다. 즉 삼면화는 '분리된 통일성' 자체다. 삼면화는 세 부분으로 분리되고 고립돼 있지만, 그 안의 형상들은 결코 격리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공통된 '빛과 색채'라는 엄연한 사실이 존재한다. 그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리듬은 서로 다른 층위의 형상을 주파하면서 진동한다. 


"나는 언제나 도살장과 동물의 살덩어리 그림에 매료되곤 했다. 아! 죽음의 냄새... 물론 기독교인들에게 십자가에 목 박힌다 함은 전혀 다른 [종교적] 의미를 띠고 있음을 알지만, 무신론자에게 도살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 가하는 행위의 하나에 불과하다." 



































다른 카테고리의 글 목록

Innermost/기억해두고 싶은 카테고리의 포스트를 톺아봅니다

내가 좋아하는 화가들 I

2017. 12. 18. 11:35 - retrouvailles



레오나르도 크레모니니 Leonardo Cremonini
"Timeless Monumentality"

- 이탈리아의 화가, 1925-2010
Leonardo Cremonini was the son of a railway worker who taught him the basics of painting. In 1935, his father had to relocate to Calabria for professional reasons. The Tyrrhenian coast where Cremonini would grow up would have a profound impact on his later work.   보아하니 아버지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던 거 같음. 사이가 좋았나봐. 이탈리아의 티레니아 해변은 크레모니니 후기작에 영감을 주었던 공간. 
Supported by a grant from the Collegio Venturoli he studied from 1932 to 1936 at the Academy of Fine Arts in Bologna, and then at the Brera Academy in Milan .   기반을 고향인 이탈리아에서 닦은 거 같음. 
- In Bologna he met Giorgio Morandi. Through him he received another scholarship, which in 1951 enabled him to stay in Paris.   순수미술을 공부했던 볼로냐에서 조르지오 모란디를 만나게 되었고, 그로부터 장학금을 받게 됨. 그리고 그 장학금 덕분에 1951년에 파리에 유학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 His art was well received and gained critical appreciation by a number of known French and Italian writers and literary figures such as Louis Althusser, Michel Butor, Italo Calvino, Regis Debray and Marc Le Bot.   크레모니니의 그림은 프랑스에서 크게 호평 받았으며, 그는 그곳에서 알튀세르, 부토, 칼비노, 드브레이, 르 보트와 사귀게 된다. 
- 1974년에는 동료 화가인 Roberta Crocioni와 결혼해서 Pietro라는 아들 하나를 슬하에 둔다. 
- 1983년부터 1992년까지는 파리 Ecole des beaux-arts 스튜디오의 수장이 된다. 당시 문화부 장관이었던 Jack Lang의 눈에는 크레모니니가 현대미술에 개방적인 인물이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크레모니니는 당대 미술계 트렌드로부터 자신을 격리시켰다. 
 - 크레모니니가..약간 그거였나본데... 동종업계에서 약간 자발적 왕따? 은따? 같은 거였나봐ㅋㅋ Cremonini seemed to be marginalized. 였다는 걸 보니까. 
- 근데 재밌는 건 그를 추앙하는 화가 중에 내가 좋아하는 
Francis Bacon이 있다는 것. 어쩐지... 둘이 그림 분위기 너무 비슷해. 
- 또 한 명은 W.H.Auden... 음... 오든 시가 좀 퇴폐적(?) 우울하긴 했지... 
- MOMA 전 국장 William Ruben도 크레모니니 호평하긴 했었던 듯. his work embodies a spirit of timeless monumentality. 라면서.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크레모니니의 그림은 
1. poetic and enigmatic imagery
2. arid, light-filled, silent interiors, described in meticulous detail 
3. populated by anemic, emotionally detached figures. 
4. geometric clarity and purity form
5. his compositions recall the still lifes of the modern Italian painter Giorgio Morandi
6. rigorously constructed spaces that adhere to the geometric laws of perspective hark back much further in history, to Piero della Francesca and other artists of the Italian Renaissance. 















다른 카테고리의 글 목록

Innermost/기억해두고 싶은 카테고리의 포스트를 톺아봅니다

오랜만에 플레이리스트

2017. 12. 17. 19:35 - retrouvailles












톰 미쉬 팬이 맞긴 맞음^^;;;






다른 카테고리의 글 목록

Innermost/Music 카테고리의 포스트를 톺아봅니다